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어느덧 11월입니다. 화려했던 단풍이 지고 무채색의 겨울이 대지를 엄습하기 시작하는 이때를 교회는 위령성월로 정하여 우리가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죽음의 심연 너머에 찬란히 빛나는 부활의 희망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어느 옛 무덤의 묘비에 이런 경구가 적혀있다고 합니다. “Hodie mihi, cras tibi.” 번역을 하자면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말이 되겠지요. 자신을 애도하기 위해 찾아온 이에게 망자가 전하는 마지막 한 마디는 이토록 처연합니다. 죽음이 오늘은 나를 찾아와 내가 이렇게 차디찬 땅속에 누워있지만 이제 머잖아 이 자리가 자네 몫이 될 터이니 마음 준비 단단히 하라고 나지막이 건네는 망자의 충고는, 우리네 삶이 늘상 죽음을 마주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 대해 가르치시며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시듯, 우리의 죽음도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하지만 예외 없이 우리 각자를 찾아올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늘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란, 죽음의 문을 지나 마침내 뵈옵게 될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이승의 재물을 모으는 데에만 급급했던 부자가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 12,20)라는 하느님의 추상같은 한 마디에 덧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했듯이,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지 않은 이의 마지막은 황망하고 허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느님을 뵈올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을까요?
루카 복음에 나오는 ‘약은 집사의 비유’(루카 16,1-8)에서 그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비유에서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여 꾸지람을 듣자, 주인에게 빈털터리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됩니다.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주인의 빚 문서를 조작하여 빚진 이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이로써 사람들의 호의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쫓겨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신세를 질 수 있게 말이죠. 어떻게 보면 자신의 불의함을 또 다른 불의로 덮은 셈이지만, 뜻밖에도 주인은 오히려 이 집사의 약삭빠름을 칭찬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의 관리자, 곧 집사인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능력과 지위, 재물을 사용하여 곤경 중에 있는 다른 형제자매들을 돕는 것. 덧없는 재물을 자신만을 위해 모으고 쌓기보다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다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고 그들과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이야말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최규하 다니엘 신부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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