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어느덧 찬바람 부는 11월, ‘위령성월’의 첫 주일입니다. 멋들어진 가을 단풍잎들이 떨어져 버린 빈 가지에 바람 한 조각 스쳐 지나가면, 우리도 자연스레 옷깃을 여미며 어느새 한 해의 마무리가 다가오고 있음을 생각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달입니다. 교회 달력으로는 올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한 해의 전례력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흘러간 올 한 해를 반성해 보게 되는 계절이며 우리보다 앞서가신 연령들을 위해 기도를 더 하게 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오늘 연중 제31주일의 복음 말씀은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태오 복음이나 루카 복음과는 달리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질문을 던진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나쁜 의도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칭찬까지 하십니다.
성경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당대 유대교의 저명한 랍비들에게 곧잘 질문되어졌던 주요 이슈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랍비들도 248가지나 되는 계명들과 365가지나 되는 파생 법 규정들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예수님 당시로서는 ‘성경’ 전체에 해당하는)에서 두 구절을 인용해서 단순, 명쾌한 답변으로 여러 율법의 중심을 잡아주십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큰 계명’ 하나만 질문받았는데, 예수님께서는 묻지 않은 ‘둘째가는 계명’까지 함께 언급해 주십니다. 마치 이 두 가지가 하나의 계명을 이루는 양면인 듯이 말입니다. 이 두 계명은 동전의 양면 같지만, 그러면서도 같지는 않은 서로 구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에서, 사랑의 척도는 ‘온 존재를 다 드리는 전적인 온전함’(‘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인 반면에, 둘째 계명에서 사랑의 척도는 ‘너 자신처럼’이 기준입니다. 하느님께는 전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의탁과 그분 뜻에 따름이 하느님을 사랑함에 있어 필수이고, 이웃 사랑은 우리가 받고 있는 하느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쉽지 않고, 용서하기 쉽지 않은 까닭은,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하고 계시는, 그래서 당신 외아드님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그 하느님을 아직 충만히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해의 마무리가 멀지 않은 시점에, 오늘 복음은 성경 가르침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늘 사랑에 굶주린 우리에게 하느님은 이미 우리를 아낌없이, 조건 없이 사랑하고 계시니 이 사랑에 응답하라고 요청하시는 듯합니다. 사랑에 굶주리면서도 사랑하기에 인색한 우리에게, 이웃 사랑을 더 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온 존재로 응답함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사랑할 때, 그 사랑하는 대상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정순택 베드로 주교 |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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