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크루즈 여행이란 걸 다녀왔다. 사실은 푹 쉬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었다. 큰 배가 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주는 대로 먹고, 수시로 변화는 바다 풍경을 느긋하게 즐기며 편하게 지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승선 후에 그게 오산이었음을 바로 깨달았다.
수면 위로 12층이나 솟아오른 거대한 배 안에는 승객 2,400명에 승무원 850이 승선한다니 웬만한 작은 마을 규모의 공동 운명체인 셈이다. 배 안의 다양한 시설을 둘러보니 푹 쉬기는 다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 안에서 설치된 각종 오락 시설과 준비된 프로그램을 모두 즐기기에는 여행 기간이 턱없이 짧을 것 같았다.
승선 절차는 비행기 탑승만큼이나 엄격했다. 모든 짐은 엑스레이 투시기를 통과해야 했다. 모든 탑승자의 사진을 찍어 컴퓨터에 입력하고, 크레딧 카드를 등록하고 여행 기간에 사용할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다. 배에 오르고 내릴 때마다 신분증을 확인하고, 청량음료와 알코올음료 그리고 물건 구매를 비롯한 여행 중에 사용하는 모든 경비는 이 카드를 통해 쓰고 자동으로 크레딧 카드로 결제되는 시스템이었다.
배는 매일 저녁에 떠나 밤새 달려서 다음 날 아침에 새 기항지-대개는 섬-에 도착한다. 그러면 하선하여 여러 가지 프로그램 중 하나를 선택하여 관광을 떠나거나 스노클링 등의 활동에 참가한다. 물론 프로그램에 따라 정해진 비용을 내야 한다. 매일 오후에 객실로 배달되는 선상 신문에 다음 날의 프로그램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았다. 알찬 프로그램은 가격이 매우 비싸고, 싼 가격을 내용이 부실할 것 같았다. 나는 많이 걷지 않는 걸 선택하면 되니까 차라리 고르기가 편했다. 하선하지 않고 배에서 시간을 보내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은 것 같았다. 돈도 아낄 겸, 꼭대기의 수영장에서 열심히 사교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이겠지.
매일 아침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는 각자 선택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난다. 이번에 다녀온 곳은 모두 섬이었는데, 우리 일행은 오래 걸을 수 없는 나를 배려해서 섬 일주 관광을 마친 후에 해변에서 쉬거나 짧은 거리를 걸으며 쇼핑을 하거나 점심을 먹었다. 일행 모두 나이가 들어서 스노클링 같은 활동에 참여할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이국적인 풍경을 즐기는 거로 만족했다.
아침 식사는 수없이 많은 음식이 준비된 뷔페식 식당에서 하였다. 음식 종류가 많아서 식성에 따라서 마음껏 골라서 먹을 수 있었지만, 먹을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어서 준비된 음식의 아주 일부만 먹어 본 게 아쉽다. 점심은 선상에서 먹기도 했고, 섬에서 해산물을 사 먹기도 했지만 Coco Cay에서 크루즈 회사에서 준비한 바베큐를 즐길 수 있었던 게 인상적이었다.
저녁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식당에서 했는데, 애피타이저, 메인 디시, 디저트, 커피 등이 제공되는 풀 코스 디너였다. 식성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메뉴가 다양했고, 웨이터도 선객을 세심하게 배려하여 즐거운 분위기에서 식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여행 중 하루 저녁은 정장을 하도록 했는데, 남자는 수트, 여자는 드레스를 입는 걸 원칙으로 했고 턱시도를 입는 사람도 있어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선내에는 즐길 거리가 참 많았다. 저녁마다 쇼를 공연한다는 수백 석 규모의 극장, 술 한 잔 나누며 분위기 있는 생음악을 감상하는 바(Bar), 쉴 새 없이 댄스 음악을 연주하는 배 중앙의 공연장, 고급과 싸구려 상품이 고루 진열된 쇼핑센터, 맨 꼭대기에 설치된 암벽 타기 시설 그리고 수영장, 제법 큰 규모의 도박장, 체육관…등에서 시간도 보내고 돈도 쓰도록 유혹했다.
나는 매일 밤 저녁 식사 후에 카지노에서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는데, 제일 하기 쉬운 슬롯머신에 매달렸다. 나흘 밤을 거기서 보내고 결산을 해 보니 맥주 세 캔 정도 살 수 있는 거금을 벌었다. (한 캔에 $7.50)
바다는 늘 잔잔했고, 배도 워낙 커서 흔들리는 것도 나아가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타이타닉 영화에서 본 로맨틱하거나 비장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젊은이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서 배 안에서는 언제나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크루즈 여행을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온갖 즐길 거리를 갖춘 큰 배에 많은 사람을 태우고 바다를 항해하며 볼 거리와 놀 거리로 즐겁게 해 주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크루스 비용은 생각보다 저렴했다. 언제 어떻게 예약하느냐에 따라 가격 차이가 있지만, 자동차로 여행하며 모텔이나 리조트에서 묵으며 세 끼 식사를 사 먹는 것보다는 비용이 덜 들었다. 더 편안한 건 말할 필요가 없고.
제1일 (5월 18일)
뉴저지에서 비행기로 마이애미, 플로리다로 이동. 승선 수속 후 선내의 대형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점심. 식사 후 배를 둘러보고 시설의 다양함과 규모에 놀라다. 오후 4시에 Nassau, Bahamas로 출발. 배가 떠나는 걸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림이 적었음.
제2일 (5월 19일)
아침 일찍 Nassau, Bahamas에 도착. 점심 후 시내 관광. 중남미 국가 중 GDP가 가장 높은 나라라던데 빈부 격차가 매우 커서인지 서민들이 사는 지역은 60년대 한국을 연상시킴. Bahamas는 7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로서 크루즈 선박의 기항지로 유명하며, 관광 수입이 국가의 주요 재원임.
제3일 (5월 20일)
아침 일찍 Coco Cay, Bahamas에 도착. 작은 섬인데 Royal Caribbean Cruise 회사에서 장기 임차하여 독점 사용하고 있음. 크루즈 선박에서 작은 배로 옮겨 타고 섬에 도착. 섬을 둘러보기로 하였는데 다리가 불편한 나에게는 어려운 코스이므로 참여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안내인의 말에 따라 홀로 비치 의자에 앉아서 맥주를 마심. 거창한 바비큐로 점을 마치고 일행은 해수욕을 즐김. 깨끗한 물과 모래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섬임.
제4일 (5월 21일)
아침 일찍 플로리다 최남단의 섬인 Key West에 도착. 버스로 헤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한적한 어촌과는 거리가 먼 관광도시라서 실망스러웠음. 식당에서 게 요리로 거창한 점심을 즐김.
제5일 (5월 22일)
출발지이자 마지막 기착지인 마이애미로 돌아옴. 하선 수속을 밟고 예약된 관광버스로 시내 관광. 코코넛 나무가 즐비한 것 말고는 그저 그런 대도시 풍경. 도시 풍경이 다 그렇지 뭐.
비행기 편으로 뉴저지로 돌아옴. 집에 가면 라면부터 끓여 먹으리라 마음먹었는데, 피곤한 탓인지 식욕을 잃어서 바로 침대로 직행.
구경 한 번 잘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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