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마르 5,30)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 5장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이야기와 열두 해 동안 앓던 여인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이 두 기적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도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이 두 기적 이야기 앞에 나오는 큰 문맥을 살펴보면, 세 공관복음서에 공통적으로 ‘풍랑을 가라앉히신 이야기’ 뒤에 ‘마귀들과 돼지 떼 이야기’가 나오고, 그 뒤에 ‘하혈병 여인 치유와 회당장 딸 소생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자연 현상’이나 ‘더러운 영’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질병’이나 ‘죽음’까지도 넘어 당신의 권능이 펼쳐짐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직후에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십니다. 유대인들이 대대로 기다려온 ‘세상적인 영광의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는 그런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기 위해 가는 도중에 여러 해 동안 병을 앓던 여인의 치유 이야기에서,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시는 것은 왜일까요? 오늘날 문화에서는 프라이버시에 해당할 내용을 굳이 드러내게 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아마도 ‘예수님의 옷자락’에 의한 ‘매직 같은 치유’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바탕한 믿음의 결과임을 드러내 주시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일상에서 우리 역시 ‘자녀들을 대학에 합격시켜 주시고’, ‘병을 낫게 해 주시고’, ‘가족들이 직장에 턱하니 합격하게 해 주시고’ 등등 여러 가지를 청하게 됩니다. 사실 나약한 피조물인 우리에게 있어 청원기도는 꼭 필요하고 합당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도 실상 일곱 가지 청원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하지만 아쉬울 때에만 하느님께 손 내밀다가, 아쉽지 않을 때는 세상 기준에 따라, 세상 삶에 매몰되어 신앙의 참된 정수를 놓치며 살기를 예수님은 바라시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하던 사람들처럼, ‘세상적인 영광을 가져다줄 메시아’만 필요로 하는 그런 ‘기복’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심’(1독서)을 깊이 신뢰하면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무능하게 돌아가심’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깊여가라는 초대가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요?
–정순택 베드로 주교 /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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