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명의 빵이다! (요한 6, 35)
신월동성당의 견진성사를 집전한 후 사진을 찍는데 한 중학생이 “주교님, 이 책에 사인 좀 해 주세요!”하고 청하였습니다. 책 제목을 보니 현대인을 위한 창조와 진화 이야기인 「쇤보른 추기경과 다윈의 유쾌한 대화」였습니다. 반가움에 눈이 번쩍 띄어 “아주 중요한 책이니 꼭 읽어요!” 하며 사인해 주니, “벌써 다 읽었어요!”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대견하고 기뻤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Sapiens)」나 「호모데우스(Homo Deus)」를 읽다 보면 참으로 마음이 슬프고 우울해짐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저자는 이 세상의 물질과 생명 세계는 ‘자연 발생(自然發生)’으로 이루어지고 심지어 인간의 자유의지까지도 그러하다고 봅니다. 감성, 지성, 의지가 인간 인격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들도 자연발생적인 선택에 따라 움직인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을 구성하는 정신적인 실체나 본질은 물론, 물질세계의 근본적인 구성요소들까지도 부정하거나 상대화시킵니다. 이런 책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지식은 결국 인간이 가꾸어온 문화와 문명을 오직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역사 발전과 번영에만 국한시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Ʀƹƞ)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라고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Ʀƹƞ)은 생물학적인 생명(ƢƟƯƲ)과 구분되는 하느님의 생명이며 인간의 모든 근원적인 갈망을 채워주는 충만함(콜로 1,19; 에페 1,23 참조)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예수님 께는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 하느님의 권능이 미치고 그분의 손길이 가져온 열매요 결실인 표징(요한 6,26 참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신앙인이 가져야 할 현실에 대한 올바른 식별 기준이 나옵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현상 안에는 그 현상을 지탱해주고 존속시키는 실상(實相)인 실재(實在)가 있는데,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께서 이 현상 안에 계신다는 것 또한 진정한 현실(realitas)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답변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탈출 16,15 참조)가 모 세가 아니라 하느님이 내려주신 빵이었으며 하느님은 지금도 계속하여 온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당신의 외 아드님을 강생의 신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써 당신의 생명 자체를 주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3.35) — 구요비 욥 주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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