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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칼럼] 민들레처럼
글쓴이 : 김형기 날짜 : 17-07-30 07:29 조회 : 372 추천 : 0
민들레처럼

진미령이 부른 하얀 민들레가 유행하던 해가 1979년이다.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우리 큰딸이 태어난 해였으니까. 언젠가 배냇저고리를 입고 누워서 양팔을 나풀거리는 큰딸을 얼르다가 라디오에서 “때가 되면 떠나요. 할 수 없어요. 안녕, 안녕, 안녕, 손을 흔들며, 두둥실 두둥실 떠나요. 민들레 민들레처럼.”이라고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듣다가 아내는 “나중에 크면 너도 떠나겠지.”라고 혼잣말을 했다. 옆에서 그 말을 들은 나는 가슴이 싸 했다. 노래는 좋은데 가사가 왜 그리도 슬픈지.

세월이 흘러 두 딸 모두 대학교에 입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며 사실상 부모 곁을 떠난 셈이다. 졸업 후에 큰딸은 대학원에 입학하고 바로 결혼했고, 작은딸은 바로 로스앤젤레스로 직장을 찾아 떠났고, 여러 해가 지나 결혼하여 지금도 거기서 살고 있으니 모두 민들레 홀씨처럼 두둥실 떠났다. 큰딸은 한 시간 반 거리의 필라델피아에 살기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찾아 가 보지만, 작은딸 가족은 한 해에 한 번 보기도 어렵다.

나와 띠 동갑이고 딸 셋을 둔 어느 분에게 따님 댁에 자주 가시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눈치 보이는 게 많아서 자주 가지 않는다고 대답하셨다. 금세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지만, 무슨 눈치를 그리 보시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딸 눈치, 사위 눈치, 손자 눈치 그리고 손녀 눈치까지 고루 보신다고 해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집 떠난 자식 집을 방문하는 부모는 다 그렇거니 생각하니 안도감마저 들었다. 딸 가족이 조금 눈치를 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는 어른이 알아서 눈치를 보며 주눅이 든다.

딸네 집에 가기로 한 날은 아침 일찍 샤워부터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친구 집을 방문할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데 말이다. 딸네 집에 도착하여 현관문을 열자마자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손부터 씻는다. 세면기 주위에 물이 떨어지면 깨끗이 닦아낸다. 깔끔한 사위 눈치가 보여서다.

식사할 때가 가장 많이 신경이 쓰인다. 딸 내외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식탁 예법에 눈치껏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입안에 음식을 둔 채 말하지 않기, 소리 내어 음식 먹지 않기, 식탁에 팔 올려놓지 않기 그리고 식탁 위의 그릇을 끌지 않기 같은 거다. 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나 집에서 하던 것과 반대로 하려니 신경 쓰이고 외손녀와 외손자에게 예의 없는 할아버지로 보일까 봐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려니 외손들 눈치가 보인다.

트림은 당연히 참아야 하고 어쩌다 방귀가 나오면 꾹 참고 모아 두었다가 나중에 화장실에서 한꺼번에 ‘드드드드’ 하고 터뜨려야 한다. 큰딸 눈치가 보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망신살이 뻗칠 것 같아서다. 그러고 보니 딸네 가족은 방귀도 뀌지 않고 트림도 하지 않는 특수 체질인가 보다.

이런 것들 모두 유치원에서부터 가르치는 기본적인 예의인데 집에서 대강 지저분하게, 대강 편하게, 대강 무례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모범 유치원생인 체하려니 어려운 거지 결코 딸네 가족이 잔소리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다. 큰딸이나 사위는 도착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빨간 것, 아니면 하얀 것?”이라고 물어보고 포도주 잔에 빨간 것이든 하얀 것이든 원하는 대로 따라 주고 우리 부부가 떠날 때까지 계속 ‘부어라 마셔라’ 할 수 있게 해주니 아비야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사위는 “오는 길에 차량 통행이 원활했는지, 성당에 나가는 건 좀 어떤지, 건강은 어떤지?” 자상하게 물어보고, 외손녀는 오랜만에 방문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반가워서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며 관심을 표하고, 재미없어도 같이 놀아 주려고 하고, 가끔 “I love you,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말하여 먼 길 온 보람을 느끼게 해 준다. 어쩌다 익숙한 솜씨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초상화라도 그려주면 보물인 양 모셔오지만, 며칠만 지나면 어디 두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내 기억력이 문제다.

딸들이야 가요 ‘하얀 민들레’의 가사와는 달리 떠나기는 했어도 가끔 돌아오기도 하고, 우리 부부가 보러 가기도 하지만, 어머니 곁을 떠난 내가 그 노래의 가사처럼 지낸다. 요즘 한국에 있는 형제들에게서 어머니 건강이 악화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선뜻 뵈러 갈 생각을 못 하니 말이다. “안녕 안녕 안녕 손을 흔들며 두둥실 두둥실 떠나요. 민들레 민들레처럼 돌아오지 않아요.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오늘은 진미령이가 눈물 나게 하네.

(2017년 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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