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로그인
어제 : 281 오늘 : 211
최대 : 890 전체 : 1,001,539
2009년 5월 23일 이후
> 나눔터 >> 사랑방
[신자칼럼] 얻는 것은 고작해야 작은 무덤 하나
글쓴이 : 김형기 날짜 : 17-05-16 09:16 조회 : 430 추천 : 0
얻는 것은 고작해야 작은 무덤 하나

10여 년 전, 큰딸 부부와 함께 로드 아일랜드 주 뉴포트(Newport)에 있는 밴더빌트 가문의 여름 별장인 The Breakers를 찾았다. 증기선과 철도를 이용한 운수업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은 밴더빌트 가문이 대서양과 맞닿은 곳에 엄청난 여름 별장을 완공한 것은 1895년이었다. 파도가 밀려와 절벽에 부딪혀서 부서지는 광경을 보고 별장 이름을 The Breakers(=흰 파도) 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별장의 부지 면적은 거의 53,000 제곱미터로서 16,000평이 조금 넘으니 아흔아홉 간 규모를 자랑하는 강릉 선교장 부지의 여섯 배가 넘는다. 방이 70개, 중앙에 있는 연회장의 높이는 13m, 실내악 연주실, 도서실, 여러 개의 주방과 식당, 유아 방…등의 방이 모두 널찍했고 실내 장식이 매우 호화스럽고 눈 바로 앞에 대서양이 펼쳐지니 경관도 뛰어났다.

건축 초기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그들 가족이 살던 뉴욕에서 이 별장까지 오려면 하인들과 각종 일상용품을 가득 실은 수많은 마차가 며칠 걸려 그곳으로 이동했다고 하니 여름 휴가 한 번 가는 것도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이 별장의 주인이었던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 2세는 이 별장을 짓고 7년 후에 세상을 떠났는데, 죽을 때까지 이 별장에서 여섯 번 묵었다고 한다.

그의 후손이 관리하던 이 별장은 1972년에 3층만 제외하고는 모두 군(郡=County) 당국에 영구 무상 임대되어 관광지로 개발되어 해마다 3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관리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서 이 건물을 공공기관에 넘겨주고 한 층만 별장으로 사용한다는 최초 소유주의 증손자야말로 금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 조상 덕으로 편안히 사는 셈이지만, 고작 여섯 번 쓰자고 호화로운 별장을 지어 놓고 일찍 세상을 떠난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 2세를 생각하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 12, 20) 라는 성경 말씀이 떠오른다. 제 돈으로 자기가 쓰는 걸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살림집이 아니라 여름 한 철 묵을 별장을 그렇게 엄청난 규모로 호화롭게 짓다니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되었다.

여러 해 전에 찾아본 강릉 경포호반의 선교장(船橋莊)은 1700년 이전에 전주 사람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이라니 ‘파도가 부서지는 집’보다 거의 200년 전에 건립된 셈이다. 처음에 안채를 짓고 건물을 하나씩 늘려가며 다 짓는 데 200년 이상이 걸렸다니 3년이 채 못 걸려서 완공된 ‘파도가 부서지는 집’에 비하면 장구한 세월이 걸린 셈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라니 미국 대부호의 별장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바다를 향해 호령하는 듯이 오만하게 서 있는 미국 별장에 비해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이 적당히 배치된 게 자연 친화적이고 소박한 느낌을 주었다. 방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모두 크기가 작아서 여염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매제의 말로는 선교장이 초등학교 동창생 집이라서 어릴 적에 자주 놀러 왔었다니 민속문화재이지만, 아직도 개인 소유인 듯하다.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선교장을 거쳐 간 주인들은 이 많은 방 중에서 몇 개나 사용해 보았을까?

내가 사는 아파트는 55세 이상만 입주할 수 있는 아파트인데 70세 이하는 별로 없고 대부분 80세 전후인 것 같다. 개인의 사생활, 특히 과거사는 말하지 않는 미국인들이라 직접 듣지는 않았어도 대개는 단독 주택에 살다가 자식들이 떠나고 나이 들어 관리가 힘들어서 집을 처분하고 아파트에 입주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는 분들인 것 같다.

젊어서는 자식들과 함께 단독 주택에서 사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나이 들면 집 관리가 힘에 부친다. 미국 주택이 대개는 크고 대지는 넓어서 툭하면 새는 지붕이나 툭하면 막히는 배관 손질, 잔디 깎기, 가끔 말썽을 피우는 냉난방 등의 전기 설비 수리, 눈 치우기와 낙엽 치우기 등의 건물 보수 관리를 일일이 사람을 불러서 시키면 비용이 들어서 웬만하면 스스로 연장을 들고 처리해야 하는데 그런 일이 끊임 없어서 나이 들면 대개는 아파트로 옮기게 된다. 주택에 살 때 주인이 직접 신경 쓰던 일을 관리인이 다 해 주니 아파트에 살면 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전화만 하면 거의 모든 골칫거리가 그날로 해결되니 왜 그렇지 않겠는가?

파도가 부서지는 집을 거쳐 간 주인들도 결국은 다음 시의 내용처럼 얻는 것은 고작해야 작은 무덤 하나, 선교장을 거쳐 간 주인들도 결국 얻는 것은 고작해야 작은 무덤 하나, 열심히 산 미국의 보통 사람들은 주택에서 아파트를 거쳐서 결국 얻는 것은 고작해야 작은 무덤 하나이니 큰 집을 얻어서 지키고자 애쓰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어리석은 아기
헛되이 노력하고 싸우고 안달하고
아무런 자격도 없이 모든 걸 원하지만
얻는 것은 고작해야 작은 무덤 하나” (쿠이 보노—토마스 카알라일)

(2017년 5월 12일)


게시물 845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845 [신자칼럼]  ‘가난한’ 마음 하나하나 모아 사랑-큰 선(… 송의용 12-14 153 0
844 [신자칼럼]  ‘가난한’ 수녀들이 ‘더 가난한’ 이웃 돕… 송의용 11-30 192 0
843 [신자칼럼]  한밤에 찾아온 손님 김형기 09-16 309 0
842 [신자칼럼]  알렐루야, 어머니 부활하셨네! 김형기 07-31 327 0
841 [신자칼럼]  민들레처럼 김형기 07-30 372 0
840 [신자칼럼]  오베라는 남자 김형기 07-14 360 0
839 [신자칼럼]  Quo Vadis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전경택 사무실 07-14 335 0
838 [신자칼럼]  외손녀의 킨더가든 졸업식 김형기 07-04 323 0
837 [신자칼럼]  여기가 어디일까? 김형기 06-24 364 0
836 [신자칼럼]  혼수상태에 빠져 보니 김형기 06-19 337 0
835 [신자칼럼]  일생현명(一生懸命) 김형기 06-08 367 0
834 [신자칼럼]  얻는 것은 고작해야 작은 무덤 하나 김형기 05-16 431 0
833 [신자칼럼]  애잔한 그의 이름 '도마', 서른 한살 … 사무실 05-14 435 0
832 [신자칼럼]  본당 유스그룹 Derek Chun 군 “상 탔어요!” 경… 송의용 05-10 501 0
831 [신자칼럼]  “한해 70명이상 영세하는 활기찬 성당 만들… 송의용 05-10 431 0
830 [신자칼럼]  내가 꿈꾸는 천국 김형기 05-06 396 0
829 [신자칼럼]  다윗성, 다윗과 모세의 얼굴 공운범 04-16 470 0
828 [신자칼럼]  부활의 숨결 공운범 04-14 459 0
827 [신자칼럼]  어디서 왔소? 어디로 가는 거요? 김형기 04-10 478 0
826 [신자칼럼]  예수님의 눈물, 사제의 눈물 공운범 03-28 513 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