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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기사] 잿더미 빵집에서'인생 답안지'찾다 [출처] 조선닷컴
글쓴이 : 사무실 날짜 : 16-11-04 19:59 조회 : 1,095 추천 : 0

[송혜진 기자의 느낌] 60주년 맞은 대전 聖心堂 대표 임영진씨 가족
"빵 나눠주는 건 '복리'… 아버지가 100배로 돌아온다 했죠"

“빵 드세요!” 성심당 네 식구는 아주 천연덕스러웠다. 바게트를 ‘앙’ 베어 무는 시늉을 해보였다. “저희 식구들은 이렇게 빵 들고 사진 찍는 걸 매일같이 하거든요. ‘어서 오세요!’ 외치는 것도, 빵 포장하거나 반죽하는 걸 거드는 것도 일상이에요. 그야말로 24시간 ‘빵빵’거리는 거죠.” 맏딸 임선씨 말이다. 왼쪽부터 둘째 아들 임도혁, 맏딸 임선, 아버지인 성심당 임영진 대표, 어머니 김미진 이사.
“빵 드세요!” 성심당 네 식구는 아주 천연덕스러웠다. 바게트를 ‘앙’ 베어 무는 시늉을 해보였다. “저희 식구들은 이렇게 빵 들고 사진 찍는 걸 매일같이 하거든요. ‘어서 오세요!’ 외치는 것도, 빵 포장하거나 반죽하는 걸 거드는 것도 일상이에요. 그야말로 24시간 ‘빵빵’거리는 거죠.” 맏딸 임선씨 말이다. 왼쪽부터 둘째 아들 임도혁, 맏딸 임선, 아버지인 성심당 임영진 대표, 어머니 김미진 이사. /신현종 기자
김미진(57)씨는 2005년 1월 22일을 또렷이 기억한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서는데 하늘이 시커먼 그을음에 뒤덮여 온통 먹빛이었다. 사람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불이야!" 소리를 따라 가보니 성심당(聖心堂)이 보였다. 1956년 시아버지가 세운 대전역 근처 빵집이다. 남편과 그가 물려받으면서 대전의 명소로 키워낸 곳이기도 하다. 그 성심당 본점 1층 매장 일부와 3층 공장이 치솟는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미진씨는 잠시 넋 놓고 화염을 바라보다 다시 성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미진씨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남편 임영진(62)씨와 큰딸 임선(35)은 당시 서울에 피정(避靜) 가고 대전에 없었다. 둘째 아들 도혁(31)은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막내딸 마리아(24)는 학교에 있었다. 미진씨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마음은 놀랍게도 후련해져 있었다.

깊은 밤 성심당이 잿더미로 변해갈 무렵, 남편과 큰딸이 대전에 도착했다. 식구들은 식당에 모여 늦은 저녁을 먹었다. TV 뉴스에서 성심당 화재 소식이 흘러나왔고 여전히 거리엔 소방차 사이렌이 울렸지만 다들 침착했다. 미진씨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지금까지 참 열심히 했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시 대학생이던 큰딸이 피식 웃었다. "전, 학교 휴학할래요." 둘째 도혁도 말했다. "전 어차피 입대하려고 했잖아요. 날짜를 앞당겨 볼게요." 식구들은 손을 잡았다. "그래, 다들 고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날이 성심당의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다. 기적은 다음 날 일어났다.

다 잃은 뒤에 비로소 얻다

―불이 났는데 어떻게 다들 그렇게 침착할 수 있죠.

임영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당시 우리는 커가는 대기업 빵집을 이길 방도를 찾지 못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어요. 당시엔 빚도 많았고 직원들 월급 주기도 버거웠습니다. 불까지 났으니 이젠 정말 정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안타깝지만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랬는데 어떻게 일어선 겁니까.

김미진 "뜻밖에도 다음 날 직원들이 잿더미에서 집기를 찾아 닦기 시작했어요. 다들 내 일터를 잃게 됐다고 생각하니 팔을 걷어 붙인 거죠. 정작 우리는 접을 마음을 하고 있는데, 그 춥고 시린 겨울에 직원들이 제빵기계를 건져내 고쳤어요. 3층 공장이 전소됐고 1층 매장도 불탔는데, 그나마 멀쩡한 4층에서 다시 빵 구울 준비를 했고, 불탄 매장은 칸막이로 가렸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잿더미 속 우리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라고 써서 붙여놓고요. 정확히 엿새 후에 그 임시 공장에서 밀가루를 빚어서 빵을 구웠어요. 앙금빵과 카스텔라를 냈죠. 다들 그 빵을 들고 엉엉 울었어요. 그날 우린 그 빵을 모두 팔았습니다."

성심당의 대표 상품 ‘튀김 소보로’.
성심당의 대표 상품 ‘튀김 소보로’.

대전에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성심당의 위용(威容)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전역사(驛舍) 빵집부터 은행동 원도심 본점과 케이크 부티크 지점, 대전 롯데백화점에 이르기까지 성심당은 곳곳에 휘날리는 깃발과도 같다. 지점마다 '튀김 소보로' '판타롱 부추빵' '대전 부르스 떡' 같은 대표 상품을 맛보려는 이들이 몰려 늘 길게 줄이 늘어선다.

성심당이 최근 60주년을 맞았다. '우리가 사랑한 빵집―성심당'이라는 책(남해의 봄날 刊)도 나왔다. 대전역 앞 노점 찐빵집으로 출발한 가게가 빵집 세 곳과 식당 6곳을 운영하게 되기까지, 4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대전행 열차를 탔다. 성심당 임영진 대표와 아내 김미진 이사, 큰딸 임선 차장과 둘째 아들 임도혁 실장은 그러나 "우리는 내일 당장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일한다"고 말했다.

―화재의 충격이 컸을 것 같은데요.

임선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어요(웃음). 일단 그렇게 불이 나서 회사가 크게 어려워지고 나니, 직원들 중에서도 회사를 관성적으로 다녔던 사람, 억지로 다녔던 사람, 회사에 해가 됐던 사람… 그런 사람들이 와르르 다 나가고 진짜 회사를 아끼는 분들만 남았어요. 위기가 40년 넘게 굴러온 조직을 걸러준 거죠."

임영진 "우리는 성심당이 진짜 어떤 곳인지 알게 됐어요. 그전까지 우리는 남들처럼 세련된 빵집을 만들고 싶어했어요. 유행에 뒤처질까 걱정했고요. 잿더미가 된 가게를 보고 함께 가슴 아파해주는 동네 사람들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성심당은 처음에 투박한 찐빵집으로 시작했거든요. 300개를 만들면 100개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곳이었고요. 그 사실이 다시 떠올랐어요. '그래, 우리 빵집은 굳이 세련될 필요가 없겠구나. 조금 촌스럽고 투박해도 따뜻함이 넘치는 곳이어야 하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죠."

성심당은 그 이후 광고를 하지 않는 빵집, 시식빵을 어느 곳보다 아낌 없이 많이 내놓는 곳, 다른 곳보다 빵이 큼직한 가게, 갓 구운 빵만 내놓는 빵집으로 소문이 났다. 매출은 곧 화재 이전보다 30%가 올랐다.

2005년 화재로 타버린 성심당 1층 매장 내부 모습.
2005년 화재로 타버린 성심당 1층 매장 내부 모습. /성심당 제공

―가족들이 원래 다들 이렇게 위기에 강하신가요.

김미진 "실은 우리 큰딸 바로 아래 여자 아이가 하나 더 있었어요. 여섯 살까지 심장병을 앓다가 하늘나라로 갔지요. 그 아이를 떠나보낼 때도 저희는 심하게 울지 않았어요. 신부님께서 '이 아이는 어린 나이에 떠났으니 천사가 됐을 것이다'고 하셨거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눈물), 아이에게 곱게 화관을 씌워주고 예쁜 명주저고리를 입혀주고 장례를 치러줬어요. 지금도 그 아이 기일엔 가족들이 묘소에 가서 소풍처럼 다같이 맛있는 것 나눠 먹고 낮잠 한숨 자다 와요. 어쩌면 그때 배웠는지도 몰라요. 인생은 예측할 수 없고, 절망은 내일이라도 올 수 있다는 걸요.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걸요…."

사과 23알과 밀가루 두 포대의 기적

성심당 창업자 임길순(1912~1997)은 함경남도 함주에서 자랐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아내와 네 딸을 데리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피란길을 떠난다. 칼바람을 가르며 흥남부두에 도착했지만, 그곳엔 피란민 10만여 명이 몰려들어 아수라장이었다. 몇 척 남지 않은 배를 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임길순은 가톨릭 신자임을 표시하는 나무 십자가와 깃발을 들고 서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때 한 미군이 다가와 “그 깃발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임길순이 묵주를 들어보이자 미군은 이들 가족을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로 안내했다. 임길순 가족은 그렇게 12월 25일 성탄절에 거제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북에서 가져온 전 재산이 인플레이션 탓에 사과 23알 살 돈밖에 되지 않음을 알게 됐다. 이들은 냉면을 팔며 생계를 이어나갔고, 진해에서 막내아들 영진을 낳았다. 1955년엔 대전으로 와서 찐빵 장사를 시작했다. 대흥동 성당 오기선 신부가 내민 밀가루 두 포대로 시작한 장사였다.

―아버지가 찐빵 300개를 만들면 200개만 팔고 100개는 남 주셨다죠.

임영진 “네, 특별한 분이셨어요. 피란길에서 살아남는 순간, 여생은 남을 위해 살겠다고 기도하셨고 그걸 지키려고 애쓰셨으니까요. 장사가 목적이 아니라, 먹을 게 없는 사람에게 뭔가 나눠주는 게 목적이셨죠. 저희는 덕분에 엄청 고생했고요(웃음).”

―가족들이 원망도 많이 했겠습니다.

임선 “할머니가 항상 그렇게 할아버지 흉을 보셨죠!(웃음) 너네 할아버지만 천당 가고 나는 못 갈 거라고. 그렇지만 저희는 할머니도 천당 가셨을 거라고 믿어요. 워낙 여장부셨는데, 대전에 소매치기가 한창 많았던 시절이 있었대요. 할머니 말로는 워낙 성심당이 주위 사람들과 먹을 걸 나누는 걸로 유명하다보니, 전대를 허리에 차고 지나가도 소매치기들이 할머니는 안 건드렸다는 거예요(웃음). 또 그런 자부심이 있으셨어요.”

2006년 성심당 50주년 행사 모습. 임영진·김미진 부부(사진 가운데)와 직원들이 케이크를 나누며 화재를 딛고 일어선 성심당의 50년을 자축했다.
2006년 성심당 50주년 행사 모습. 임영진·김미진 부부(사진 가운데)와 직원들이 케이크를 나누며 화재를 딛고 일어선 성심당의 50년을 자축했다. /성심당

―아버님이 워낙 기도밖에 모르는 분이라서 답답한 것도 많았다고 하고요.

김미진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열고 기도로 끝냈으니, 자식들은 아무래도 고되죠. 눈이 펑펑 와도 새벽 미사는 꼭 가야 했으니 어린아이들은 힘들고요. 시누이들조차 그래서 ‘결혼하면 내 자식은 그렇게 안 키우겠다’고 결심했다는데, 다들 워낙 보고 배운 게 체화가 돼서 여전히 그러고 지내요(웃음).”

임도혁 “집에 가면 늘 할아버지가 붓으로 써서 붙여 놓은 기도 문구 같은 게 있었어요. 가령 ‘해돋이부터 해넘이까지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식으로요. 어릴 땐 그것만 봐도 졸렸죠(웃음). 그런데 이상해요. 할아버지께선 항상 집 대문 열고 닫을 때마다 십자가를 보면서 성호를 그으셨는데, 요새 저희가 그러고 다녀요. 누가 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어느덧 몸에 밴 거죠.”

―아버지께서 번 돈과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을 ‘복리 계산’이라고 부르셨다죠.

임영진 “‘공짜가 아니다, 100배로 돌아온다’고 하셨어요. 늘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면 ‘그것 봐라, 공짜가 아니라고 했지’ 하셨고요.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30년 전쯤 공장을 증축하려 했는데 구청 허가를 받는 게 너무 복잡해서 그냥 공사를 시작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민원이 들어가면서 철거반이 들이닥쳤거든요. 그런데 철거반장이 들어와서 우리 빵집을 둘러보더니 ‘그냥 나가자’고 하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철거반장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었는데, 저희 아버지가 그 분 염부터 입관까지 장례를 치러주는 봉사를 했다는 거죠. 철거반장이 그런 우리 아버지를 기억해내고 그냥 돌아간 거고요. 새삼 배운 게 많은 날이었죠….”

모든 이에게 좋은 것

2006년은 화재를 딛고 일어선 성심당이 50주년을 맞은 해였다. 1999년 무렵부터 임영진 대표와 김미진 이사는 이탈리아의 새로운 공유경제를 주창한 키아라 루빅(Lubich·1920~2008)의 ‘포콜라레(Focolare·벽난로) 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임 대표는 성심당 곳곳에 사훈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서 12장 17절)’를 적어 붙여 놓기 시작했다. 회사를 위한 구체적인 비전도 이 무렵부터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매달 3000만원어치의 빵을 기부하고, 회사 수익의 15%는 무조건 인센티브로 직원에게 돌려주기 시작한 게 이 무렵부터인가요?

임영진 “빵 기부는 아버지 때부터 했던 것을 이어나가다 보니 액수가 늘어난 것뿐이고요, 회사 수익은 그 무렵부터 나눈 거죠. ‘회사를 통해 모두가 잘살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만약 이렇게 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걸 제가 보여줄 수 있다면 분명 남들도 따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어느 순간 사회 전체가 이런 분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성심당 창업주인 임길순·한순덕 부부와 그 자녀 임영진·김미진 부부.
성심당 창업주인 임길순·한순덕 부부와 그 자녀 임영진·김미진 부부. /성심당
―그렇게 해서도 돈이 벌리던가요?

임영진 “예(웃음). 물론 부침이 없을 순 없겠지만 안정적으로 회사를 굴릴 수 있고 매출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죠.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뚜렷한데 대충 일하는 직원은 없습니다.”

―성심당은 회의 방식도 남다르다죠.

김미진 “다들 한 마디씩 해야 돼요. 돌아가면서(웃음). 말단부터 임원까지 똑같이요. 보통은 임원만 얘기하는데, 여기는 막내도 똑같이 몇분 이상 자기 생각을 말해요. 빵 만드는 사람들은 빵만 만들다 보니 자기 생각을 말할 기회가 많지 않아요. 그렇게 자기 생각을 자꾸 말하다 보면 스스로 일하는 이유, 목표와 지향점이 정리가 되고 논리가 뚜렷해지죠. 그래서 가끔 외국에서 워크숍 하면 다들 ‘성심당 직원들은 따로 스피치 교육 받느냐’고 물어요. 워낙 말들을 잘해서요(웃음).”

최근 성심당은 대전시와 손잡고 옛 충남도지사 공관에서 ‘나의 도시 나의 성심당’이라는 주제로 성심당과 관련된 물품 전시회를 열고 있다. 성심당 60년을 통해 대전 60년을 보여주는 무료 전시다. 13일까지 열린다. 김미진 이사는 “우리는 따져보면 사실 함주에서 내려온 뜨내기였는데 지난 60년 동안 대전이라는 도시에 순정을 바쳤고, 그러다 보니 토박이가 되었다. 그 뜨내기의 순정에 대한 이야기, 도시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빵집이 그 동네와 함께 커가는 걸 고민해야 된다는 얘기로 들리네요.

김미진 “맞아요. 한때는 저도 ‘왜 우리는 강남역 뉴욕제과처럼 화려한 장소에서 빵집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요새는 대전에서 빵을 팔 수 있는 지금이 자랑스럽고 행복해요. 대전답게, 대전의 농산물을 활용해서, 우리만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더 오래 길게 아름답게 가는 것 아닌가 싶어요.”

답을 아는 사람은 고민하지 않는다

인터뷰 말미에도 성심당을 드나드는 손님은 줄어들 줄 몰랐다. 금요일 오후여서인지 성심당 본점은 점점 더 분주해졌다.

―2005년에 큰 불이 났던 것처럼 성심당에 다시 위기가 닥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삶은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가족들은 뜻밖에도 이 질문에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큰딸 임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거 아세요? 저희 아빠는 저금을 못하게 하세요, 보험도 들지 말라고 하세요(웃음). 왜 그런 줄 아세요? 사람이 언제 어떻게 죽을 줄 알고 그런 걸 하느냐는 거예요. 그저 열심히 일하고 벌어서 쓰고, 남는 건 다 어려운 사람들 주고, 그러고 저세상 가면 된다는 거죠! 그래서 제게 대학 가라는 얘기를 한 번도 안 하셨어요. ‘대학 입학증 들고 오는 날 죽을지도 몰라’라면서요.”

김미진 이사도 말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매일 가르치는 게 있어요. ‘내일 당장 망해서 리어카를 끌게 될지라도, 즐겁고 재미있게 끌 수 있어야 한다’고요. 저는 아이들에게 성심당을 물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건 언제 없어질지 몰라요. 진짜 물려줄 수 있는 건, 성심당을 지금껏 끌고 온 우리의 시간이겠죠.”

임영진 대표가 덧붙였다. “우리는 2005년 화재를 겪으면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답이 무엇인지 한 번 봤어요. 답안지를 한 번 본 사람은 고민할 필요가 없죠. 또 위기가 온다면 그만큼 힘들겠지만, 그래도 우린 적어도 방황하진 않을 거예요.”

성심당 사람들과 헤어져 대전역으로 왔다. TV에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뉴스가 너울거렸다. 대전역사 성심당에서 튀김 소보로빵을 하나 사서 깨물었다.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눈물겨운 맛이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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